서예 가운데 한국 역사상 추사체만큼 경지에 다다른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도 드물다. 설문조사 결과 한국의 미술사가들은 모두 추사의 작품을 ‘최고의 글씨’로 꼽았다. 그 중에서도 ‘불이선란도’는 詩·書·畵의 일체를 보여주며 초서, 예서, 행서 등 다양한 글씨체를 혼융해내는 것에서 그 탁월함을 능히 알 수 있는데, 서예전공자인 이동국 씨가 이를 중심으로 추사체의 미덕을 살펴보았다. /편집자주
고도의 理念美를 전적으로 筆劃과 墨色으로 창설한 이로 추사(1786~1856)가 꼽히며, 그의 작품 중에서도 ‘불이선란도’는 최고 완숙미를 갖춘 작품이다. 혹자는 ‘세한도’를 앞세우기도 하지만 詩·書·畵의 혼융을 三絶로 완전히 보여준 ‘불이선란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불이선란도’는 추사체가 완전히 농익어 소위 碑學과 帖學의 성과가 혼융·완성되는 말년의 작품이자 서예적 추상성과 불교적 초월성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우선 작품의 구성을 보자. ‘불이선란도’는 이름 때문에 습관적으로 난초에 눈이 가게 되지만 글씨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 뿌리의 난화를 둘러싸고 한수의 題詩와 세 종류의 跋文, 自號와 다양한 印文의 낙관이 있기 때문이다. 난을 먼저 그린 후 제발을 했는데, 순서에 유의해서 봐야 그 내용적 맥락을 제대로 알 수 있다(표2 참조).
그런데 알고보면 시·서·화·각 등 다분히 이질적인 요소들이 主從의 관계없이 난화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절묘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런 조화로운 화면경영에는 그림과 글씨를 넘나드는 추사의 필법이 숨어있다. 이는 추사자신이 高踏을 추구하는 隱逸處士로서의 자부심을 표출한 발문에서도 밝히고 있는데, ‘草隸와 기이한 글자 쓰는 법으로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할 수 있으랴(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라고 한 데서 확인된다. 사실 ‘초예기자지법’은 문인화의 이상을 실천하는 방법론으로 동기창(1555~1636)으로부터 확인되지만, 추사처럼 蘭이라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형상을 극단적으로 관념화 해 점과 획으로 해체시킨 이는 드물다.
그림과 글씨영역에 따라 극도로 절제된 먹의 농담, 方圓의 필이 혼융되며 구사된 난의 줄기나 글씨의 획은 이미 둘이 아니라 ‘초예기자지법’ 한가지일 뿐이다. 나아가 점획의 太細나 長短 등 서로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조형요소가 그림과 글씨에 조화롭게 하나로 적용되는 데서 ‘불이선란도’의 아름다움은 역설적으로 奇怪와 古拙로 다가온다.
특히 <표1>의 1열과 2열의 ‘天’·‘達’·‘俊’·‘筆’ 과 같이 각종 획이 축약되거나 ‘有’·‘客’·‘蘭’·‘摩’와 같이 극도로 길게 강조되면서 이런 재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題詩의 章法을 봐도 <표2> ①-1의 첫 행에서 보듯 ‘不’와 ‘作’, ‘蘭’과 ‘花’의 大小대비나 예서와 행서·초서 등 서로 다른 서체의 운용을 통해 극단적인 변화 속에서도 조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표1>의 3열에서 보이는 ‘放’·‘筆’·‘可’·‘有’등과 같이 급기야는 필획마저도 뭉뚱그려지고 해체되면서 그림과 글씨의 경계를 없애기까지 한다. 난의 잎 또한 50세 전후 완성된‘난맹첩’의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은 엄격한 비수와 三轉의 묘미와, 더불어 통상적인 鳳眼이나 象眼도 생략되거나 무시되면서 그저 점획으로 해체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와 고졸의 미가 唐楷의 正法을 토대로 西漢 예서의 고졸함을 획득한 秋史體의 완성지점과 그대로 만난다는 사실이다. 즉, 추사체의 미감은 단순히 글씨에 국한된 것도 아니며, 奇하고 怪함 또한 바름(正)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불이선란도’의 진정한 가치는 몇 줄기의 극도로 절제된 필선으로 글씨 쓰듯 그림을 그린 것에만 있지 않다. 요컨대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던 것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난 주위의 여백에 추사 특유의 강건 활달하고, 서권기 넘치는 필체로 쓴 제시나 발문, ‘仙客老人’·‘曼香’과 같은 自號나 ‘樂文天下士’·‘金正喜印’·‘古硯齋’ 등의 인문이 가득해 오히려 시문과 글씨가 주가 된다. 사실 그림은 속성상 자연물의 외형적 묘사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데, 추사는 畵題를 통해 난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자신의 심회를 드러내고 있다.
“난을 치지 않은지 20년/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을 그려 냈구나/ 문 닫고 찾고 또 찾은 곳/ 이 경지가 바로 유마 불이선일세”(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이 화제를 통해 우린 추사가 난초 그림의 畵意를 ‘불이선’에 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요컨대 시를 통해 제시된 ‘불이선’의 화두는 초예와 기자의 글씨·그림으로 현현된다. 이러한 ‘不二’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維摩詰所說經’의 入不二法門品에 나온다. 유마가 “절대 평등한 경지에 대해 어떻게 대립을 떠나야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문수가 답하기를 “모든 것에 있어 말도 없고, 설할 것도 없고, 나타낼 것도, 인식할 것도 없으니 일체의 문답을 떠나는 것이 절대 평등, 즉 不二의 경지에 들어가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하고선, 다시 어떻게 생각하냐고 되물었다.
이 때의 상황을 유마경에선 “유마는 오직 침묵하여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모든 행동이나 언어의 표현은 신발 위에서 가려움을 긁는 것과 같아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나 도달하지는 못한다는 것인데, 이는 유가의 性이나 敬과도 통한다. 추사는 그런 경지를 한 포기의 난을 치며, 제시와 글씨를 통해 생각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추사의 문인예술가로서 위치와 미덕은 한마디로 ‘혼융’, 즉 관념과 사실, 법도와 일탈, 유·불, 시서화, 서법과 화법, 碑派와 帖派를 아우르는-에 있다. 추사체가 전대 글씨와 차별성을 갖는 이유도 혼융의 미에서 발견된다. 조선의 이용, 한호, 이광사는 비록 중국의 조맹부나 미불, 동기창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왕희지를 글씨의 궁극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추사는 여기서 나아가 글씨의 이상을 王法 이전의 서한 예서에서 찾고 있다. 서예미학적 관점에서도 그 기저는 다같이 5백년 조선유학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초기 왕조 개창기의 화려함, 중기 도학시대의 엄정함, 후기 실학시대의 개성적인 아름다움위에 추사는 엄정함과 개성이 禪氣 가득한 기괴와 고졸과 하나 되는 지점위에 서 있는 것이다.
고인이 된 동주선생은 완당에 대해 ‘청조취미가 淸人의 작품도 脫態하여 자기의 것을 만드는 특유한 소질을 가졌고, 고관대작과 더불어 문인, 묵객, 역관, 釋家에 까지 문인화의 새 바람을 집어넣고 심지어 직업화가에까지 문인풍을 흉내 내게 하는 완당바람을 만들었지만, 이것이 오늘의 시점에서 뒤돌아보면 한국이라는 땅에 뿌리 뻗고 자라날 그림의 꽃나무들을 모진 바람으로 꺾어 버린 것 같다’고 피력한 바 있다.
이는 ‘완당바람’이 진경산수화 등 사실주의 화풍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필자는 의견을 달리한다. 이유는 이미 겸재와 단원에 의해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절정에 다다랐으며, 추사에 의해 마지막으로 문인화가 완성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요컨대 추사는 유·불을 넘나들며 글씨와 그림을 하나 되게 하며 그림의 지평을 글씨로까지 제대로 넓혔던 인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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